Love & Paris

파리에서 음악과 사랑을…

‘음악 이야기’ 카테고리의 보관물

오펜바흐 Offenbach

게시자: lovenparis 켬 6월 20, 2009

자크 오펜바흐 (Jacques Offenbach, 1819년 6월 20일 ~ 1880년 10월 5일)는 독일 태생의 프랑스 작곡가이자 첼리스트이다.

어릴 때 파리에 와서 첼로를 공부하였다. 그는 프랑스 극장의 지휘자가 되어 경쾌하고 재미있는 오페라를 많이 발표하여 ‘프랑스 오페레타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작품으로 <호프만의 이야기> <천국과 지옥> 등 100여 편이 있다.

근대 뮤지컬 코메디의 전신인 오페레타 형식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가장 영향력있는 작곡가들 중 하나이고, 많은 그의 작품들이 현재까지 공연 레파토리로 남아있다. 대표작품으로는《호프만의 이야기》, 《지옥의 오르페우스》, 《아름다운 헬레네》등이 있다  

IMGP0586

오펜바흐는 독일의 쾰른(Köln)에서 성가대의 선창자  책제본자, 음악 교사이자 작곡가인 이자크 유다 에버스트(Issac Juda Eberst)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살던 시기는 나폴레옹 칙령으로 인해 유태인은 계승된 가족성을 바꿀 것이 요구되었다. 그는 순회 공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미 관객들에게는 오펜바흐 암 마인의 출신이라 “그 오펜바흐”로 불렸기에, 성을 오펜바흐로 바꾸었다. 그의 아들에게는 출생시 야곱 오펜바흐(Jacob Levy Offenbach)란 이름을 지어줬지만, 오펜바흐는 프랑스에 정착한 후 ‘자크’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오펜바흐는 1833년 파리로 이주하여 첼로를 공부하였다. 그는 오페라 코미크 교향악단에서 첼로 연주자 자리로 들어가서, 많은 기악곡을 작곡하였다. 1844년 오펠바흐는 카톨릭교로 개종하고, 에르미니에 드 알카인과 결혼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혁명으로인한 폭력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독일로 그의 아내와 딸과 함께 1848년 독일로 돌아왔으나, 일년 뒤 파리로 다시 되돌아가 루이 나폴레옹 3세 지배와 가장 가까운 음악가가 되었다. 1850년 오펜바흐는 프랑수아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나, 1855년 몽시니 거리(Rue de Monsigny)에서 부프 파리지앵(Bouffes Parisiens)이라는 자신의 소극장을 설립하였다. 오펜바흐는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대부분 오페레타와 오페라 코미크에 헌신하며, 작곡가, 감독으로서의 성공을 거뒀다.IMGP0588

오펜바흐 생가 ,오페라 바로 옆길

오펜바흐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기적으로 공연된다. 영어권 국가에서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오페레타는 《지옥의 오르페우스》와 《아름다운 헬레네》, 《제롤스탱 대공비》, 《파리의 삶》, 《페리콜》이다.《 즐거운 파리의 아가씨》(Gaîté Parisienne)은 종종 발레 음악으로 듣게 되는데, 이는 혼성곡으로 1938년에 마뉴엘 로젠탈이 오펜바흐 멜로디를 관현악으로 화려하게 편곡하였다.

오펠바흐의 마지막 오페라인 《호프만의 이야기》는 그의 다른 작품보다 진지한 편인데, 아마도 어릿광대가 진지하게 여겨지기 바라는 영원의 소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880년에 그의 사망으로 미완성으로 남았으나, 친구인 에르네스트 기로에 의해 완성되고, 1881년에 초연되었다.

오펜바흐는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 묘지에 있다.사진 016

오펜바흐의 무덤  몽마르트르 묘지

게시됨: 음악 이야기 | 댓글 달기 »

륄리 Jean-Baptiste Lully 1632~1687

게시자: lovenparis 켬 6월 9, 2009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출생하였다. 방앗간집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에 요리사의 보조원으로 일하다가 프랑스로 이민하였다. 바이올린 연주자로 루이 14세의 궁정으로 들어가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고 왕실 현악소합주단을 주재하였으며, 1661년 왕실음악 총감독이 되었다. 1662년경부터는 몰리에르와 알게 되어 그와 협력, 고전희극과 궁정발레를 결합시킨 코믹발레를 창작하였으며, 1669년 왕의 허락을 얻어 오페라 상영권을 독점하고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아마디스》(1684) 《아르미드와 르도》(1686) 등 많은 고전적인 장대한 오페라를 발표하였다. 그의 오페라는 이탈리아오페라 작풍을 기초로 하면서도 프랑스어의 특성을 살린 가창형식을 채택하였으며, 또한 관현악부를 중시하고 발레와 합창을 중용하는 등 새로운 프랑스오페라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주요작품으로는 코믹발레 《강제결혼 Le mariage forcé》(1664) 《서민귀족 Le Bourgeois gentilhomme》(1670), 오페라 《프시케 Psyché》(1678) 등과, 《미제레레 Miserere》 《테데움 Te Deum》 등의 종교음악도 남겼다.

 

이 동영상을 보면 이 시대의 지휘법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륄리는 지휘중 실수로 자신의 발등을 찍어, 얼마후 파상풍으로 죽었대나~~

 

 

 

 

게시됨: 음악 이야기 | 댓글 달기 »

에릭 사티 Erik Alfred Leslie Satie 1866.5.17~1925.7.1

게시자: lovenparis 켬 5월 27, 2009

 

프랑스 노르망디의 옹플뤠흐  출생.

 옹프루르의 교회 오르가니스트인 비노에게 피아노와 그레고리오성가를 배우고, 12세 때 파리로 나와 콩세르바트와르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아카데미즘에 반감을 느껴 이듬해 퇴학하고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다. 1887년 처음으로 피아노곡집을 출판하여 그 특이한 악풍으로 파리악단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생계를 위하여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동안 드뷔시를 사귀게 되었다. 1905년 39세의 나이로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대위법을 배우고 1909년 졸업하였는데, 이 무렵에 콕토, 피카소, 댜길레프 등과도 사귀었다. 1916년 콕토의 시나리오에 곡을 붙인 발레곡 《파라드 parade》를 발표하고, 또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큐비즘 ·다다이즘 등의 예술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미요 등 ‘프랑스 6인조’는 사티를 높이 평가하여 그들의 정신적인 아버지로 삼았으며, 1923년에는 6인조의 다음 세대인 데조르미에르가 사티를 중심으로 한 그룹을 만들어 ‘아르쾨유악파’가 출범하였다. 이와 같은 칭찬 속에서도 사티 자신은 불안과 회의, 정신적인 고독에 싸인 채 죽었다.

 작풍의 특징은 본질적으로 어린이와 같은 순수성에 있으며 작품에는 교향적 극작품 《소크라테스》, 발레음악 《파라드》, 피아노곡 《배[梨] 모양의 3개의 곡 Trois Morceaux en forme de poire》(1903) 《개를 위한 엉성한 진짜 전주곡 Vértable prélude flasques(pour un chien)》 《바싹 마른 태아 Embryons dessénchés》 《관료적인 소나티네 Sonatine bureaucratique》 등이 있다..

 

 

 

몽마르트 언덕 근처에 생가가 있으나 보존되어 있지 않고 명패안 있다 . 사티 박물관이 그가 태어난 도시 옹플뤠흐에 있다satie_1986_33

 

사티 박물관 가는 방법

Paris Saint Lazare 역에서 Honfleur 가는 기차이용   http://en.ot-honfleur.fr/Discover-Honfleur,2,0,0.html   참고

주소와 연락처 

67, boulevard Charles V, 14600 Honfleur
Tél : 02 31 89 11 11
Fax : 02 31 89 09 99

여는 시간  10시 -19시

입장료   어른 5.10 Euros   학생 3.60 euros

 

 

게시됨: 음악 이야기 | 댓글 달기 »

지휘자 정명훈 아프리카에 가다!

게시자: lovenparis 켬 12월 28, 2008

유니세프 친선대서로 아프리카에서 찍은 동영상 이네요.

 

즐겁게 봐주세요

게시됨: 음악 이야기 | 댓글 달기 »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게시자: lovenparis 켬 11월 13, 2008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곡가,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근대음악의 두 기둥’이라 불린다. ‘전람회의 그림’ 의 관현악 편곡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고, 그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다채로운 음색과 악기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포레에게 작곡을 배웠고 리스트의 피아노를 계승하는 새로운 피아노니스트로 인정받았다. 전쟁 중 오른손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완성하기도하였다. 쇼팽, 리스트, 샤브리에, 포레,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영향을 받았으며, 볼레로는 근대무용가 루빈슈타인 부인의 요청으로 작곡하였다.

음악은 에스파냐의 민족춤곡인 ‘볼레로’ 의 리듬이 탬버린 연주로 시작되는데, 그 리듬과 멜로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으며, 종장으로 갈수록 점점 세어져 가는 근대적인 수법을 사용하였다.

「볼레로」라는 것은, 1780년 무용가인 세레소(S.Cerezo)가 발명한 스페인의 무곡으로서 독특한 리듬을 지닌 3/4박자의 느린 춤곡이다. 형식은 대개 2개의 주제에 의한 2개의 부분이 제시되어 이것의 변주적인 반복 구조가 중심을 이룬다. 라벨이 최후에 쓴 발레곡이기도 한 볼레로Boléro는, 1928년 파리에 있던 러시아의 무용가 ‘이다 루빈스타인’의 부탁으로 작곡된 것으로 이 작품이 발레로써 초연되었을 때 국립오페라좌에서 열광적인 절찬을 받았으며, 그후 여러나라에서 다투어 연주되었다.

느릿한 동양적인 맛을 풍기는 두개의 연속적인 가락이 볼레로의 리듬을 타고 발전이나 변형이 없이 그대로 반복되어 엮여 나간다. 같은 C장조로 나가다가 마지막 두 마디 만이 조바꿈을 하게된다. 악기는 독주 이외는 유니즌으로 연주되며 다른 악기는 리듬과 액센트만을 붙여 진행하다가 후반부에 들어가 평행화현이 붙여진다.

음악은 특징 있는 두 개의 주제, 16마디 단위의 ‘스페인/아라비아풍 주제’와 두 마디의 볼레로 리듬이 장장 169회 되풀이될 뿐, 멜로디도 하모니도 리듬도 철저히 동일한 형태로 반복된다. 유일하게 변화하는 것은 악기 편성에 따른 음색과 음량뿐이라는, 음악사상 그때까지 예가 없던 것이다. 반복될 때마다 악기의 수를 늘이고, 마지막으로 3관 편성의 풀 오케스트라가 주제를 연주하며, 더구나 오케스트라의 장대한 크레센도가 가장 절정에 달했을 때 맨 마지막의 불과 두 마디에서 급전하여 음악이 끝난다.

 이 발레는 스페인의 어느 술집에서 한 무용수가 춤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 여인이 원형탁자에서 볼레로를 추는 것을 많은 구경꾼들이 지켜보고 있다. 춤은 점차 가경으로 들어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구경꾼들은 손뼉을 치며 발로 장단을 맞추고 흥분은 점점 고조된다

게시됨: 음악 이야기 | 댓글 달기 »

파리에서의 쇼팽 (1)

게시자: lovenparis 켬 11월 5, 2008

1831년 9월말경에 파리에 도착한 그는 그 규모와 함께 ‘화려함과 추잡함, 미덕과 악덕’의 극치에 압도당했다.
그러나 곧 폴란드 밖의 그 어디에서도 혈족의 끈끈한 유대감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빈에 있는 친구의 소개로 파리의 연주 무대에서 성공한 인물들과 사귈 수 있게 되었지만 쇼팽은 곧 많은 폴란드 이주민들과 프란츠 리스트, 엑토르 베를리오즈, 펠릭스 멘델스존, 빈센초 벨리니를 포함한 보다 젊은 세대의 작곡가들과 첼로 연주자 오귀스트 프랑콤에게서 정서적인 동질감을 발견했다.
파리에서 먼저 부딪힌 문제는 직업과 재정적인 문제였다. 카미유 플레옐의 살롱에서 1832년 2월에 있었던 데뷔 연주와 음악원 대강당에서 5월에 있었던 연주 이후, 그는 건반을 다루는 데 있어서의 극단적인 섬세함으로 인해 보다 큰 공간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취향에 부합할 수 없음을 알고 낙심했다.
그러나 금융업을 하는 부유한 로트쉴드 가족과 만나게 됨으로써 갑자기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우아한 매너와 세련된 옷차림, 타고난 감각의 소유자인 쇼팽은 연주가·음악교사로서 파리의 대저택에서 가장 환영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곡으로는 놀랄 만큼 시적인 2권의 연습곡집 〈발라드 G단조〉〈즉흥 환상곡 Fantaisie-Impromptu〉, 쇼팽의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마주르카와 폴로네즈 등 작은 소품들이 있다.
dscn36322
파리의 쇼팽무덤

게시됨: 음악 이야기 | 댓글 달기 »

메시앙

게시자: lovenparis 켬 10월 16, 2008

Olivier Messiaen, 1908.12.10~1992.4.27

프랑스의 작곡가. 당시 성행하던 신고전주의적 추상미를 추구하는 경향에 반대해 현대에 ‘살아 있는 음악’을 창조하고, 음악을 인간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찾으려 하는 공통된 목적에 따라 실험적인 작곡활동을 했다

아비뇽 출생. 파리음악원에서 M.뒤프레, P.뒤카에게 사사하고 1936년 ‘젊은 프랑스’를 결성, 당시 성행하던 신고전주의적인 추상미를 추구하는 경향에 반대하여 현대에 ‘살아 있는 음악’을 창조하고, 음악을 인간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찾으려 하는 공통된 목적에 따라 작곡활동을 하였다. 1942년 모교의 교수가 되고, 1944년에는 자신의 작곡법을 종합하여 《나의 음악어법》을 펴내 작곡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현대 음악어법에의 귀중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1949년에는 피아노곡 《음가와 강도의 모드》 《뇜 리트미크》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중요한 작법인 ‘뮈지크 세리에르’의 출발점이 되어 브레즈 ·쉬토크하우젠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 1952년에는 파리방송국에서 뮈지크 콩크레트에도 손을 대어 《음색=지속》을 제작, 전위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 창작의 근원은 가톨리즘에 있는데, 오르간곡 《주의 강탄》(1935)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곡》(1941), 피아노곡 《아멘의 환영》(1943)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20개의 눈매》(1943) 등에 그 경향이 뚜렷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교적 엑조티시즘을 소재로 한 가곡집 《아라위, 사랑과 죽음의 노래》(12곡, 1945) 《튀랑갈리라교향곡》(1948), 합창곡 《5개의 르샹》(1948) 등 실험적인 작품을 작곡하고, 새소리를 악보에 채택한 피아노의 오케스트라 《새들의 눈뜸》(1952), 관현악곡 《이국의 새들》(1955∼1956), 피아노곡 《새의 카탈로그》(1956∼1958) 등을 작곡하였다. 그 후에도 실내악 《7개의 하이카이》(1963), 합창과 오케스트라 《주의 변용》(1969) 등을 작곡하였다

정명훈 지휘의 튀랑갈리라 교향곡

게시됨: 음악 이야기 | 댓글 달기 »

바이올린

게시자: lovenparis 켬 9월 4, 2008

바이올린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초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악기는 16세기 후반의 것이지만, 그 이전에도 북부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회화나 문헌에서 바이올린이 묘사되어 있다.

활이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된 것은 18세기 말이다. 처음에는 반원형, 즉 무기의 활을 닮은 모습이었지만 기술적 요청에 따라 서서히 개량되었다. 몸통 부분도 약간의 변화를 맞았다. 먼저 연주되는 곡의 음역이 증가함에 따라 지판이 길어졌다. 또, 보다 높은 피치에 대응하기 위해 목 부분이 뒤로 젖혀졌다. 18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악기의 대부분은 현재와 같이 개량되었으며 이들을 현대의 바이올린이라고 한다. 또, 수리를 받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바로크 바이올린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만들어진 바이올린도 바로크 바이올린의 형태로 되어 있으면 바로크 바이올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음향을 전기 신호로 바꾸는 전자 어쿠스틱 바이올린, 현의 진동을 직접 전기 신호로 바꾸는 전자 바이올린도 등장하였다.

전체 길이는 약 60cm이며, 무게는 대체로 500g 미만이다. 나무로 되어 있지만 부위에 따라 쓰이는 나무는 다르다. 바이올린에는 보호를 위해 니스칠이 되어 있으며, 이로써 악기가 광택이 있게 되어 외형이 아름다워 보이게 한다

4개의 현으로 되어 있다. 정면에서 볼 때 왼쪽이 저음, 오른쪽이 고음의 현이며, 높은 소리의 현 순으로 E선, A선, D선, G선이라고 부른다.

페그를 돌리면서 현악기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지만 E선은 가늘어서 끊어지기 쉽기 때문에 어드저스터라는 작은 나사를 사용하여 높낮이를 조절하기도 한다. 어린이는 페그를 돌리기 힘들기 때문에 어드저스터가 모든 현을 뒷받쳐 주는 어린이용 바이올린을 사용한다.

탄력 있는 굽은 목제 막대기에 말 꼬리 털이 평평하게 쳐 있고 이 털에 송진을 발라 마찰을 강하게 한다. 이로써 현 위를 비빌 수 있게 된다. 헤드에는 팁으로 불리는 얇은 보호판이 있고 상아, 쇠뼈, 은판이 이용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나일론 계열의 합성 수지를 쓰는 경우가 많다. 은판 등의 금속제 팁은 핀을 가리면서 고정하므로 헤드 부분의 안쪽에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활은 잘 보관된 오래된 프랑스제가 가장 뛰어나다

현은 활로 비비면서 진동한다. 음색은 종류나 활을 잡는 법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음색은 악기마다도 특색이 나온다. 이러한 소리의 차이에 대해서는 음향학에서도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니스의 영향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보통은 니스 자체가 악기의 음질을 좋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게시됨: 음악 이야기 | 댓글 달기 »

기욤 드 마쇼 Guillaume de Machaut, 1300?~1377.4

게시자: lovenparis 켬 9월 1, 2008

 

14세기 프랑스의 작곡가·시인. 랭스대성당의 참사회원이었다.

 13세기 교회의 폴리포니 기법과 음유시14세기 프랑스의 아르스노바 음악을 확립인 가곡의 감각적인 표현을 종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확립하였다.  시인으로 론도·발라드 등의 시형 확립에 기여했다  

샹파뉴아르덴주 출생. 그의 생애에는 불확실한 점이 많으나, 1337년 랭스대성당의 참사회원 으로 활약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사곡·모테토·세속 샹송 등을 작곡했고, 13세기 교회의 폴리포니 기법과 음유시14세기 프랑스의 아르스노바 음악을 확립인 가곡의 감각적인 표현을 종합하여 새로운 하였다.

시인으로서도 론도·발라드 등의 시형 확립에 기여하였다.

게시됨: 음악 이야기 | 댓글 달기 »

마리아 칼라스

게시자: lovenparis 켬 8월 27, 2008

마리아 칼라스 납골당. Pere lachaise 묘지   전철.3번 Pere lachaise 역

 

칼라스….

74년 서울과 도쿄 공연을 끝으로 연주활동을 접은 칼라스는

파리로 돌아와  숨어 지내다시피 한다.

그러다 그녀도 쇼팽처럼 파리에서 쓸쓸히 혼자 죽음을 맞이했다.

화려했지만 또한 비참 하기도 했던 비운의 소프라노 칼라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영원히 우리의 마음을 울려줄 것이다….

-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에게는 세 여인이 있었는데 첫째는 그와 처음 결혼한 티나 리바누로 오나시스와는 29살의 차이가 있었는데 결국 이혼했습니다. 두 번째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미망인인 재클린과 1968년 재혼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소프라노 여가수 중 한명인  마리아 칼라스인데 그녀는 오나시스의 임종을 지켜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나시스는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 심장 마비 증세를 일으켜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리아 칼라스는 파리에서 은둔하다가 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게시됨: 음악 이야기 | 댓글 달기 »

 
팔로우

모든 새 글을 수신함으로 전달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