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 Paris

파리에서 음악과 사랑을…

이브 몽땅 Yves Montand

게시자: lovenparis 켬 7월 24, 2008

1991년 11월 9일 프랑스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은 모든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국민가수이자 국민배우인 이브 몽땅 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대표적인 샹송 고엽을 비롯해 그의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울려퍼졌고 텔레비전에서는 그가 출연한 영화가 방영됐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해 “그와 함께 우리시대의 위대한 목소리와 배우로서의 뛰어난 재능이 사라졌다”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샤를 드골 사망 이후 프랑스는 슬픔에 잠겼다.

이브 몽탕은 이처럼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영화배우였지만 그의 생애를 더욱 빛나게 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편에서 좌파 정치활동을 벌여 온 것이었다. 프랑스 공산당(PCF)의 당원이자, 정치영화의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정치활동과 예술을 결합시킨 프랑스 최고의 좌파 예술가였다

가수이며 배우인 이브몽땅은 20세기 프랑스의 최고의 인기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그의 본명은 IVO Livi 이며 1921년 이탈리아 토스카니 지방의 작은 마을 에서 태어났다.  가족 모두가 프랑스로 이주하여 1929년에는 프랑스 국적을 얻었고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이브 몽땅은 11살때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14살이 되었을때는 그의 누나가 일하는 미용실에서 일하게된다.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브몽땅은 수줍은 성격을 가지고있었는데 1938년에 작은 역할로 뮤지컬에 데뷔하면서 본명대신 이브몽땅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된다.

점점 더 사람들에게 알려지며 성공을 하게된 이브몽땅은 세계대전으로 잠시 활동을 접게되지만 전쟁후에는  파리에서 새로운 성공을 거둔다.에디뜨 피아프의 도움으로 더욱 유명해진 이브 몽탕은 영화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헐리우드가 그에게 주목하기도 했지만 당시 매카시즘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미국은 그의 가족의 공산주의 전력을 들어 입국을 불허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가수이자 배우인 몽탕의 인기는 더욱 커져갔다. 1951년 그는 당시 인기 여배우인 시몬느 시뇨레와 만나 이듬해 결혼을 했다.

그가 공산당 활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쯤이었다. 그는 1950년 원자폭탄에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으로 가입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가 공산당 당원이 된 것이다. 그의 아내 시몬느 시뇨레 역시 공산당 당원으로 가입해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몽탕은 가수,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집회에 참가해 연설을 하면서 정치적인 활동을 벌였고 1956년에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을 방문해 환대를 받았다.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이 있었던 이 때 몽탕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매카시즘의 열풍이 잦아들었던 1960년 그는 아내인 시몬느가 상을 받기 위해 로스앤젤리스에 머무는 동안 마릴린 먼로와  사랑합시다 라는영화를 찍었다. 영화보다는 그와 마를린 몬로와의 염문이 세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의 무덤은 파리 Pere lachaise 묘지에 있다

전철 Pere lachaise 하차.

 

 

 

 

 

 

 

 

 

이브 몽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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